"엄마, 저녁은 그냥 사 먹자." 여행 내내 내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유명하다는 라멘집은 기본 1시간 웨이팅, 빼곡한 일본어 메뉴판 앞에서 부모님은 늘 주저하셨다. 나에겐 별미인 달고 짠 일본 음식이 며칠 이어지자 두 분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여행의 설렘도 매 끼니의 낯섦 앞에서는 지쳐간다는 것을.

그러다 우연히 들른 숙소 근처 작은 슈퍼마켓. 나는 화려한 도시락과 맥주 코너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부모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반찬 코너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셨다. 그곳엔 한국의 시장 반찬처럼 정갈하게 담긴 생선조림, 계란말이, 각종 나물 무침이 있었다. 그 익숙한 비주얼에 안도하는 두 분의 표정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아, 여행지에서도 '집밥'의 따스함, 그 예측 가능한 맛의 위로가 필요하셨구나.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의 일본 여행 필수 코스는 관광지가 아닌, 현지 슈퍼마켓이 되었다. 처음엔 그저 장이나 보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웬걸. 그곳은 제철 과일과 채소, 지역 특산품, 처음 보는 조미료가 가득한 일본의 진짜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이었다. 무엇보다 지친 부모님의 입맛과 기력을 되찾아주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되어주었다.

일본 슈퍼마켓은 단순한 쇼핑을 넘어,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의 질을 수직 상승시키는 비밀 병기나 다름없었다. 혹시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저녁 무렵 동네 슈퍼마켓 산책은 꼭 일정에 넣어보시라.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어떻게 이 보물창고를 100% 활용했는지, 그 첫 번째 이야기인 '도시락과 반찬 코너'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겠다.

부모님과 일본 여행? 슈퍼마켓은 선택이 아닌 필수 코스!
부모님 입맛 저격! 낯선 일본 음식이 힘드실 때, 현지 슈퍼마켓은 최고의 해결책이 됩니다. 온 가족이 만족하는 일본 슈퍼마켓 쇼핑 리스트와 꿀팁을 대방출합니다.

도시락과 반찬 코너, 여긴 정말 신세계

일본 음식, 물론 맛있다. 하지만 매 끼니를 라멘, 스시, 텐동으로 채우기엔 부모님 입맛엔 조금 자극적일 수 있다. 느끼하거나 짜다는 평이 나오기 시작할 때쯤, 슈퍼마켓의 '소자이(惣菜)' 코너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소자이란 즉석에서 먹을 수 있도록 조리된 반찬이나 도시락, 튀김 등을 총칭하는 말인데, 우리에겐 그야말로 '일본식 백반 뷔페'나 다름없었다.

여긴 정말 없는 게 없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고등어 소금구이(塩焼き), 달짝지근한 간장에 푹 조려낸 가자미 조림(煮付け), 푹신한 일본식 계란말이(だし巻き卵)는 기본이다. 거기에 연근이나 우엉 조림, 감자 샐러드, 시금치 무침(おひたし)까지. 마치 한국의 동네 반찬가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겨운 풍경에 엄마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셨다.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신중하게 골라 담아 숙소에서 펼쳐놓으니,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우리 가족만의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처음엔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할 수 있다. 그럴 땐 '메인 요리 하나 + 채소 반찬 둘' 공식을 기억하자. 예를 들어, 아버지는 장어구이 도시락, 어머니는 연어 소금구이, 나는 돈가스를 메인으로 고른다. 여기에 다 같이 먹을 채소 조림이나 샐러드를 한두 팩 곁들이고, 갓 지은 밥(パックご飯)이나 주먹밥(おにぎり)을 추가하면 완벽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이렇게 각자 취향대로 조합하는 재미 덕분에, 매일 저녁 슈퍼마켓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특히 저녁 7시가 넘어가면 시작되는 '마감 세일'은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처음엔 20%, 30% 할인 스티커(割引シール)가 붙기 시작하다가, 폐점 시간이 가까워지면 '半額(한가쿠, 반값)' 스티커가 등장한다. 이 순간을 노리는 현지인들과 함께 눈치 싸움을 벌이는 재미도 쏠쏠하다. 800엔짜리 모둠 초밥을 400엔에 '득템'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여행 경비도 아끼고, 매일 밤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저녁 7시 이후, 할인 스티커를 노리자!

도시락, 스시, 튀김, 샐러드 등 당일 조리 상품은 저녁이 되면 할인에 들어갑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할인율이 높아지지만, 인기 상품은 일찍 품절될 수 있으니 타이밍이 중요해요.

전자레인지, 부끄러워 말고 사용하자

숙소에 전자레인지가 없다면? 슈퍼마켓 계산대 근처에 있는 공용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세요. 점원에게 '아타타메테 구다사이(温めてください)'라고 부탁하면 흔쾌히 데워주기도 합니다.

낯선 식재료 속 보물찾기: 부모님 취향저격 선물

“이건 무슨 된장이고 저건 무슨 간장이래? 종류가 뭐 이리 많아?”

엄마는 된장(미소) 코너 앞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셨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얀 된장, 빨간 된장, 곡물이 살아있는 된장까지. 슈퍼마켓의 조미료 코너는 요리를 좋아하는 부모님께 최고의 놀이터였다. 돈키호테에서 파는 흔한 과자나 화장품보다, 한국에 돌아가서 직접 요리해볼 수 있는 현지 식재료야말로 훨씬 더 실용적이고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될 수 있다.

특히 추천하는 품목은 '다시 팩'. 멸치, 가쓰오부시, 표고버섯 등이 황금 비율로 들어있어 뜯어서 넣고 끓이기만 하면 깊은 맛의 육수가 완성된다. 요리를 즐겨 하시는 부모님이라면 100% 만족할 선물이다. 그 외에도 유자 향이 상큼한 '유즈코쇼', 지역 특산 간장, 각종 절임 반찬(츠케모노)도 인기가 좋다. 일본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라이프(ライフ)나 이온(イオン) 같은 곳에 가면 PB 상품(자체 브랜드)도 많아 저렴하고 품질 좋은 제품을 고를 수 있다.

어른들을 위한 간식 타임, 주류와 디저트

여행의 밤은 그냥 잠들기 아쉽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주류 코너를, 어머니를 위해서는 디저트 코너를 둘러보자.

일본 슈퍼마켓의 주류 코너는 정말 방대하다. 특히 캔맥주 종류는 상상을 초월한다. 삿포로, 아사히 같은 유명 브랜드는 물론, 각 지역에서만 파는 한정판 '지비루(地ビール)'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아빠와 함께 오늘 하루 여행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나누는 시간은 여행의 피로를 싹 가시게 했다. 사케나 과일 맛 츄하이도 종류가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해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디저트는 어떨까? 크림이 가득 든 편의점 롤케이크도 유명하지만, 부모님 입맛에는 슈퍼마켓의 화과자나 찹쌀떡(모찌), 푸딩 종류가 더 맞을 수 있다. 특히 계절 한정으로 나오는 딸기 모찌나 몽블랑 푸딩은 꼭 맛봐야 할 별미.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어,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엄마도 정말 맛있게 드셨다.

여행자를 위한 실용 팁

일본 슈퍼마켓,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겠죠?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함께하는 슈퍼마켓 쇼핑을 더 편안하게 만들어 줄 몇 가지 팁을 정리해 본다.

첫째, 일부 대형 슈퍼마켓은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면세(Tax-Free) 서비스를 제공한다. 보통 5,000엔 이상 구매 시 가능한데, 여권을 꼭 챙겨가서 계산할 때 문의해 보자. 소소한 조미료나 과자를 사다 보면 금액은 생각보다 금방 채워진다. 자세한 정보는 일본 관광청 면세점 안내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일본은 비닐봉투가 유료다. 계산할 때마다 3~5엔씩 내야 하니, 한국에서 쓰던 장바구니(에코백)를 하나 챙겨가면 유용하다. 환경도 보호하고, 동전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셋째, 결제는 현금과 카드 모두 준비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체인 슈퍼마켓은 카드 결제가 가능하지만, 동네의 작은 슈퍼나 개인 상점에서는 여전히 현금만 받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슈퍼마켓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다. 그 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고,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훌륭한 휴식처이자,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탐험의 공간이다. 부모님과 함께 장바구니를 채우는 소소한 경험이, 화려한 관광지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따뜻한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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